1
철이 되면 철새로
너희들은 내게로 오지
얼마나 머무를까
늦여름부터 설레어 주던
예년의 코스모스 밭은
콘크리트 속으로 숨고
하늘을 돌며
하늘을 돌며
내리지 못하는 날갯짓을
곁눈으로 훔치던 나는
창문 닫고 돌아 누워
얼.마.나.머.무.를.까.
2
철이 되면 철새로 와서
철이 되면 철새로 가버리며
봄마다 실연(실연)을 주던 너희들은
이 땅에게도 시련이었겠지
초가을부터 여민
단단한 옷깃 사이로
너희들의 고향보다
더 찬 바람이 불고
나는 성에 낀 창문 열고
훠-이. 훠-이. 소리친다.
돌아가다오. 내리지 말고.
한발작도 딛지 말고.
3
첫 서리는 가루약처럼
드문 드문
하늘에 번져
그 서리는
몸살져 누운
이 땅의 이마를 어루만지고,
눈가루는 표백제마냥
희뿌옇게
하늘을 탈색시켜
새들은 부스럭거리며
하늘을 지쳐 힘겹게 날고.
4
그 뒤로 그 마을엔
겨울새가 날지 않았고
아무도
새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한 구석, 농담처럼
꽃은 피고
옷깃 풀기 시작한
사람 몇몇
남쪽에서 날아와, 주춤
내리지 못하는
몇 마리 새에게
겸연쩍게 등돌려 서는
그 뒤의 그 마을엔
- 1992. 제25회 한양대학교 한대신문 학술상 당선작 (우수상)
1991년, 18세, 대학 신입생 시절. 가슴 속에 뜨거운 불을 안고 살았다. 가끔은 불덩이가 활활 타올라 목구멍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태반은 축축하게 젖은 공기에 압도당한 채 살아갔다. 청춘이라 하는데,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술에 취해 살았고, 시라는 것에 욕심을 부리며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게, '시'라는 것을 탐닉했다. 모든 것이 다 심드렁한데, 기형도, 이성복, 황지우, 이문재, 안재찬 같은 시인들의 시집은 짜고, 맵고, 쓰고, 달았다. 시를 잘 쓰는 선배가 부러웠고, 선배가 시를 잘 쓰던 동기를 칭찬하면 질투했다. 별볼일 없던 나였지만, 어울려 시 공부를 하던 동료들 중에, 내가 시를 잘 쓴다는 자만을 품고 있었다.
대학 2학년 가을, 아무도 모르게, 교내 학술상에 응모했다. 수상을 하고 나서, 당시 등단을 앞뒀던, 내가 매우 좋아하던 선배가, 4학년때 학술상을 수상했으니, "나야 뭐, 연습삼아 내본 거"라고 둘러댔지만, 실은 조금이라도 빨리 학술상을 수상하고, 졸업 전에 등단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수상 소식을 듣고(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기쁜 마음으로 은행잎 가득한 교정을 뛰어다녔다), 수상작들이 실린 한대신문이 나왔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건청 교수님의 작은 심사평이 먼저 들어왔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한계가 극복되길 바란다.'는 충고가 실려 있었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숨겨 놓은 나쁜 비밀을 들켜버린 것만 같았다. 거부했지만, 그건 나만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비겁했지만, 나는 그때, 극복할 수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시기적인 '느낌'일 뿐,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교수님의 심사평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부했고, '최우수상' 작으로 선정된 시가 나의 시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수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리며 '사사'를 요청드리는 일도 하지 않았다(몇몇 선배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지만). 시가 실린 '신문 한 장'은 25년이 흐른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지만, '심사평'이 실린 '다른 한 장'은 어디에 갔는지 없다. 그리고, 아마도, 얼마 후부터, 나는 시를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간은 썼겠지만, 이미 내 관심에서 멀어진 일이었다.
25년이 흘렀다. 신문 한 장을 다시 꺼내 본다. 부끄럽다. 말할 수 없이. 교수님의 나이가 되고 보니, 교수님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을 '한계'가 보인다. 치기와 겉멋, 허약한 본질이 부끄럽다. 당시 애써 인정하지 않고, 다시 읽어보려 하지 않던, 내 시의 왼편에 함께 실려 있던 최우수작(김상수, <한강>)이 눈에 들어 온다. 참 좋다. 슬프지만, 따뜻하다. 깊다.
25년이 흘렀다. 시를 쓰지 않으면 어떤가, 좋은 시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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